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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고 없는 시절, 여름 얼음화채의 비밀 겨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는 지혜, 빙고(氷庫)현대인들에게 얼음은 냉장고에서 언제든 쉽게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존재지만, 냉동 기술이 없던 조선시대에는 여름철 얼음을 구하는 일이 국가적 사업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겨울철에 얼어붙은 강물에서 채취한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기 위해 '빙고(氷庫)'라는 특별한 저장고를 만들었다. 빙고는 지하에 건설된 석조 구조물로, 이중벽 사이에 왕겨나 톱밥을 채워 단열 효과를 높였다. 가장 유명한 빙고는 서울 성북동에 있던 조선시대 관설 빙고(官設氷庫)로, 북악산 북쪽 기슭에 위치하여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 만들어졌다.겨울에 채취한 얼음은 두께가 약 1015cm 정도로 잘라서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얼음 사이에는 왕겨나 볏짚을 깔아 얼음끼리 달라붙지 않도록 하고, 단.. 2025. 5. 4.
고택 마루에 흐르는 시간 세월의 흔적이 쌓인 고택의 마루한국 전통 고택의 마루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켜가 겹겹이 쌓인 역사의 무대이자,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삶의 장소이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맨발로 밟아 반들반들 윤이 난 마루의 나무 결은 마치 오래된 지도처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여름날 아침, 동쪽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마루를 비출 때면 나무의 결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시간의 층위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고택의 마루는 대개 단단한 소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겨울의 혹한과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며 집의 근간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마루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가 되어, 방문객들에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시간성을 경험하게 한다. 마루 위에 앉.. 2025. 5. 4.
터에 깃든 삶의 질서 - 풍수지리 동양 문화의 지혜, 풍수지리의 본질풍수지리는 단순한 미신이나 점술이 아닌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동양의 지혜체계라 할 수 있다. '바람(風)과 물(水)'을 뜻하는 풍수(風水)는 자연의 기(氣)가 흐르는 방향과 지형의 조건을 분석하여 인간 생활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내는 학문이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진 풍수지리는 집터를 정하거나 마을을 형성할 때 산과 물의 흐름, 방향, 높낮이 등을 고려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을 제시했다. 이는 현대 환경공학이나 지리학적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접근법으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특히 한국의 배산임수(背山臨水) 방식은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을 바라보는 지형을 이상적으로 여겼.. 2025. 5. 3.
전통 오일장 – 사라지는 장터의 기억 장터가 있는 날, 마을은 살아난다내가 처음 오일장을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외갓집이 있는 시골마을이었다.평소엔 한적하기만 하던 마을 골목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트럭과 리어카, 작은 천막들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노란 두부를 써는 칼 소리, 방금 볶은 깨를 파는 아주머니의 구수한 사투리, 그리고 어깨를 부딪히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그날 마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생기 있었다. 마치, 오일장이라는 마법의 주문이 마을 전체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했다.오일장은 ‘5일마다 한 번씩 서는 장(場)’이다. 3일, 8일, 13일, 18일, 23일, 28일처럼 끝자리가 3과 8인 날짜에 열리는 ‘3·8장’이 있는가 하면, 1과 6, 혹은 4와 9에 서는 장도 있다. 농경 사회였던 한국에서는 이런 오일장이 지역 경제와 .. 2025. 5. 2.
상여소리, 공동체가 떠나가는 이를 보내는 소리 1. 마을 끝자락, 느린 행렬이 시작될 때아득한 어느 마을의 새벽.바람이 산 너머에서 내려오고, 흙길 위에 발자국이 차곡차곡 새겨진다.그 가운데, 무언가 묵직한 것이 움직인다.흰 천으로 감싸인 관이 나무 상여에 실리고, 그 앞에선 사내들이 일정한 박자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에헤이야데야~ 나가세~”이것이 바로 ‘상여소리’다.사람 하나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길목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를 잇는 소리.울음인지 노래인지, 주문인지 탄식인지 모를 그 목소리는마치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이를 품에 안고, 다시 태우는 의식처럼 들린다.상여소리는 단순한 노동요가 아니다.죽음을 맞이한 이와, 그를 보내는 사람들의 감정이 뒤섞인한 편의 서사이고, 공동체의 기도이며, 살아남은 자들의 슬픈 축복이다.장례 행렬은 조용하지 않.. 2025. 5. 2.
담장 너머 들리는 소리 – 한국 정원 문화에 대하여 담장이 말을 걸어온다어느 날, 골목을 걷다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 적이 있다. 바람에 스치는 대나무 잎사귀 소리, 어딘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의 울음. 나는 그 담장을 넘지 않았지만, 그 너머에 작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정원은 이렇게 열린 듯 닫힌 공간이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바람과 물, 나무와 새소리를 통해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서양의 정원처럼 격식을 갖춰 대대적으로 뽐내지도 않고, 일본의 정원처럼 과도하게 다듬어 인간의 의지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한국의 정원은 오히려 자연에 한 발짝 물러서며, 자연이 스스로 자라는 방식을 존중한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과 저쪽이 서로 조심스럽게.. 2025. 5. 1.